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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교회답게 1 - 성공회 교회는 무엇일까?

작성자 아모스 | 날짜 2018/09/08 | 첨부 춤_앙리 마티스_1909-1910_상트 페트라부르크 국립미술관.jpg

성공회 교회는 무엇일까?

 

성공회 교회의 특징을 나타내는 표현 중 하나는 Via media(중용)이다. 직역하면 중도이다. 이것은 어디선가 하루아침에 뚝 떨어진 가치가 아니다. Via media(중용)는 시작된 배경이 있었고, 지나온 과정이 있고, 현재의 평가도 있다.

영국 성공회는 1534년 헨리8세의 수장령으로 시작되었다. 이것은 영국의 국민교회가 태어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때 영국 성공회는 로마가톨릭과 퓨리턴(개혁파)로 양분되어 극렬한 갈등상황에 있었다. 이후 영국 성공회의 교회는 에드워드 6(개혁파) - 메리 1(로만가톨릭) - 엘리자베스 1(중도)를 거친다. 그러나 실제 현실에서 중도가 실현된 적은 없었다.

엘리자베스 1세 사후, 제임스 1(개혁파 신앙을 따르면서 전통적인 주교제를 유지) - 찰스 1(국민교회 입장에서 개혁파 탄압) - 청교도 혁명(개혁파의 입장에서 찰스 1세를 처형) - 크롬웰 공화국(왕정과 국민교회 폐지) - 제임스 2(크롬웰의 동생으로 로마가톨릭의 입장)가 왕위에 우여곡절 끝에 즉위 한다. 이때 왕위즉위를 찬성한 토리당(로마가톨릭)과 휘그당(개혁파)로 영국은 양분된다. 이후 제임스 2세는 명예혁명으로 왕위에서 물러나고 메리 2세와 윌리엄 3세가 공동 통치자로 즉위 한다. 이때 관용법을 제정하여 성공회는 국민교회에서 국가교회로 전환된다.

국민교회는 교회의 권위로 국민 전체를 통합하려는 국민국가 형성을 위한 기반이었다. 그러나 이 시도는 실패로 끝난다. 그 대신에 법률적인 합의를 바탕으로 관용을 이룬 특권을 가진 국가교회로 정립된다. 이후 18세기 존 웨슬리를 중심으로 한 복음주의 운동이 나타나고 이후 감리교를 형성한다. 또한 근대 계몽주의의 영향으로 자유주의파가 교회 안에 자리를 잡았다. 곧 영국 성공회는 중도라는 국교회의 낮고 조약한 울타리 안에서 이런 저런 입장에서 격렬한 토론을 벌이는 각축장이 되었다. 모두를 포용하겠다는 것은 실패했고, 중도를 가겠다는 것도 좌절되었다. 곧 자기의 입장만이 모든 가치기준이 되어버린 상황에서 하느님 안에서 일치를 이루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런 상황에서 성공회 가톨릭주의는 일치를 향한 참된 신앙과 교회의 권위가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물으면서 시작되었다. 성공회 가톨릭주의는 신앙의 원천을 교회공동체에서 찾았다. 우리의 신앙을 한 개인의 취향이나 선택에 기대지 않고, 온전히 일치를 이루었던 교회, 다양한 의견 가운데 일치를 이루었던 하나이요, 거룩하고, 공번되며,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에서 찾고자 했다. 이는 교회가 역사의 뿌리를 가진 공동체라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고, 이 토대로부터 신앙의 원천을 찾고자 하는 노력이다.

개인들의 집합체로서 교회가 아니라, 공동체로서 교회를 되살린다. 그리고 하늘 높이 올라 어디에 있는지도 모를 지경인 추상화된 그리스도를 지금 이곳에 성사(聖事)로 드러내는 것이 성공회 교회의 사명이다.<임종호 사제>

이 성공회 가톨릭주의의 영향을 받은 초대주교 존 코프와 선교사들이 대한성공회(조선종고성교회)를 설립했고, 그 정신은 128년 동안 작지만 분명하게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이곳저곳에서 삶에 대한 대안을 많이 찾고 있고, 여러 실험도 진행되고 있다. 이런 흐름 속에서 성공회의 신앙은 가장 급진적이고, 가장 근본적이다.<주낙현 사제>

앞으로 성공회 교회는 특별히 한국 사회 안에서 더더욱 소수로 자리 잡을 것이다. 개인주의와 소비주의가 결탁하고 개인의 욕망과 취향이 최고의 가치가 된 지금, 또 이것들에 적절히 부합하며 커져가는 개별화된 영성주의는 성공회 교회가 지향하는 역사성과 공동체성을 강하게 밀어낼 것이다. 그럼에도 성공회는 끊임없이 교회의 역사를 묻고, 공동체를 지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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