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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례연재1] 전례행동과 몸의 언어

작성자 아모스 | 날짜 2019/01/27 | 첨부

전례 행동과 몸의 언어1



주낙현 요셉 신부 (서울주교좌성당 – 전례학 ・ 성공회 신학)



전례는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펼치신 구원 사건을 신자들이 함께 모여서 감사하고 축하하는 행동이다. 신앙의 선조들이 보여준 모범을 따라 그리스도인은 감사와 축하의 마음을 몸의 움직임으로 표현한다. 내적인 깨달음과 체험을 외적인 상징과 몸짓으로 드러내는 현상은 거의 모든 종교에서 찾을 수 있다.



의례를 연구하는 인류학자들은 말의 언어와 함께, 몸의 언어가 의사소통의 중요한 차원을 이룬다고 말한다. 그리스도교 전례는 하느님과 인간의 소통, 그리고 인간 사이의 소통이 일어나는 시공간이다. 전례에 담긴 말의 뜻과 몸의 행동이 일치하면 그 소통의 차원은 더 깊어진다. 이 소통 경험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과 인간을 향한 마음과 몸짓을 갖춘다. 전례를 신앙의 예절이라고 말하는 까닭이기도 하다.



그동안 전례 행동에 대한 오해도 적지 않았다. 역사에서는 몸의 행동을 지나치게 강조하거나 강제했던 일이 있었다. 16세기 개신교 종교개혁은 중세교회에서 만든 의례 행동을 신앙의 문제로 연결하여 비판하기도 했다. 그 결과 개신교 예배는 ‘머리로 드리는 예배’에 집착하여 몸의 행동을 극도로 자제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여러 신앙 운동을 겪으면서 몸의 언어가 중요하다는 점을 깨닫기 시작했다. 마음의 생각과 몸의 표현을 하나로 잇는 일은 ‘온전하게 살아있는 인간이야말로 하느님의 영광’이라고 말한 교부 이레네우스 성인의 가르침과도 닿아 있다. 인간의 몸짓은 하느님을 예배하는 가장 아름다운 행동이다.



또 다른 염려가 없지 않다. 최근 사회 문화의 복고주의 유행을 뜻하는 ‘뉴트로’ 현상은 사소한 전례 행동에 집착하는, 이른바 ‘전례 마니아’를 낳기도 한다. ‘의례주의’라 불리는 이 흐름은 역사에서 자주 되풀이 됐다. 소중하게 기억했던 옛 체험을 간직하려는 마음에서 나왔는지 모른다. 또는 첨단 기술로 단순 정보 전달의 양과 속도가 크게 빨라지면서 자신도 모르게 공허한 마음의 한켠을 위로하려는 몸부림일 수도 있다. 그러나 살아서 감동을 주는 전례는 과거와 현재가 서로 조화를 이루고, 그 안에서 뜻을 헤아려 미래를 바라보며 움직일 때 일어난다.



전례 행동에 관한 고정관념은 대체로 그 역사와 의미를 연결하지 못하기 때문에 나타난다. 모든 행동은 유래가 있고 의미를 담고 있다. 또한 발전하면서 의미를 더하거나 빼면서 행동 자체가 변하기도 한다. 이점을 이해하지 못하면 전례 행동의 의미를 지나치게 축소하거나 생명력을 짓누르고 만다. 뜻을 알고 행동하며, 행동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체험하는 일이 전례 행동의 목적이다. 뜻이 담긴 신학과 이를 펼치는 문화의 맥락 안에서 우리는 전례의 행동을 조정하며 쇄신한다. 이때 전례 안에서 몸의 행동은 저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 형성을 돕는다.



전례의 행동과 몸의 언어는 하느님의 구원 사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겠다는 신자의 의지이다. 이 행동으로 그리스도인은 머리뿐만 아니라 온몸으로 예배를 드린다. 온몸으로 드리는 예배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펼치신 새로운 세계를 몸의 모든 감각으로 느끼며, 더 큰 하느님의 신비에 자신을 내어 맡길 수 있다.



성공회신문 2019년 1월 12일 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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