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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회는 개신교? 천주교? 1편 - 개신교 측 입장에서

작성자 아모스 | 날짜 2019/10/25 | 첨부 -

성공회는 개신교? 천주교?

1- 개신교 측 입장에서

 

김두승 아모스

 

들어가며

성공회는 무엇을 위해 존재할까. 성공회 신학을 묻기 위해서는 먼저 성공회의 존재 이유를 물어야 한다. 성공회 신학은 분명히 종교개혁 시대의 물결을 따라 진행된 개혁운동이었다. 그렇다면 그 개혁이 무엇이냐를 중심적으로 묻는 것이야 말로 성공회 신학을 무엇인지를 묻는 것이며, 이 물음의 방향은 성공회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를 묻는 일이다.

 

헨리 8세와 토마스 크랜머

헨리 8세로부터 시작된 종교개혁의 운동은 종교개혁이라고 하기보다는 정치개혁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지금처럼 종교와 정치가 분리된 사회에서 종교개혁이라고 하면 무언가 종교적 교리나, 예전, 종교기관의 구조와 체질개선 등을 떠올리기 쉽다. 그러나 종교개혁이 시작되던 당시만 해도 유럽대륙 전체는 하나의 거대한 재정일치의 사회였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곧 종교는 정치이고, 정치는 종교였다. 그리스도교자체가 하나의 국가체제였다. 그 전에 아래에서 헨리 8세의 종교개혁을 살펴봐야 한다.

 

헨리 8세를 교황으로부터의 재정, 인사, 사법권을 분리시켰다. 그러나 그 분리와 독립에는 무슨 의도와 의미가 있겠는가. 교황 중심으로 조직된 그리스도교 독점 체제가 더 이상 제 기능을 못했다는 것을 말한다. 로만 카톨릭이 자신만의 구원을 위한 조직체계가 전부인 것처럼 주장하고 모든 가치를 상대화 시키며 하느님의 구원 사역을 제한하였다고도 볼 수 있다. 종교개혁은 정치적인 독립이 눈에 띄기는 했지만 하나의 거대한 구원을 디자인하는 과정이라고도 볼 수 있다. 왕권이 교황권보다 중요해진 것도, 왕은 권위의 상징으로서 지배자가 아니라 사목과 조율자로서의 역할이 더 중요해졌다. 사실 절대왕권이나 파시즘이 근대 이후에 등장했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토마스 크랜머는 진정 자신들에게 어울리는 하느님의 구원은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고민한 신학자이다. 천년을 넘게 한 조직체계를 유지해온 그리스도교가 하루아침에 체질을 바꾸고 진리를 향한 모험을 하기에는 아직 몸이 만들어지지 않았다. 개혁주의 운동은 모든 체계를 부인하며 새로운 국가체계를 만들려는 노력이었다면, 성공회는 카톨릭주의와 개혁주의가 주장하는 구원의 체계를 심사숙고하여 자신만의 구원의 체계를 세우려는 시도였다. 곧 성공회는 카톨릭주의와 개혁주의 사이에서 적당히 가교의 역할을 하겠다는 종교가 아니라, 진짜 자신의 구원의 길을 찾고 가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그렇다면 그 구원은 무엇인가. 구원은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성공회는 이때부터 논쟁을 멈추지 않고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 구원에 대한 체계 또는 방법을 결정짓는 일은 인간이 하느님을 규정하고 문자에 가둔다는 것을 뜻한다. 성공회는 하느님을 절대적으로 인정하고 인간의 나약함과 한계를 인정하는 체질이다. 그 체질은 종교개혁 초기부터 시작되었다.

 

성공회는 개혁적이다. 끊임없이 자신의 구원의 길을 묻고 발전시켜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을 단정적으로 결론짓지 않는다. 이 연장선상에서 성공회는 기도서라는 것을 만든다. 첨예하게 대립하고 서로 정죄하던 개신교의 아욱스부르크 신조와 천주교의 트리엔트 공의회 선언과는 달리, 자신들의 상황에서 지금까지 쌓아오고 논쟁하고 기도하며 싸워온 결과물을 고백하는 것이다. 누군가를 부정하거나 부인하는 신앙의 모습을 가질 수 없다. 혹시라도 하느님은 내가 반대하는 사람의 편을 들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 않은가. 그렇기 때문에 최소한이라도 이것만큼은 고백할 수 있는 것을 만든 것이 기도서다.

내가 믿는바 인생에 정말 중요한 질문은 그렇게 정답이 나질 않는다. 예를 들어 나는 누구인가?’, ‘사람은 왜 사는가. 왜 죽는가.’등 문자가 개발된 지 4천년이 흘러도 이 질문에 대답할 인간은 없다. 신앙에 있어서 정말 중요한 질문들은 대답되어질 수 없다. 끊임없이 그 대답을 좇고 사랑하고 연구하는 것 외에는 인간에게 방법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은혜를 구해야 한다.

 

2. 리차드 후커와 비아메디아

리차드 후커는 성공회의 체질을 견고히 다졌다고 할 수 있다. ‘이것도 저것도 아니다.’는 식의 책임회피의 신앙이 있다. 반면 정말 그것이 전부이겠느냐고 묻는 용기가 있다. 그런 눈으로 논쟁을 보면 카톨릭주의와 개혁주의는 자신들만이 전부라는 결론을 내린 채로 서로를 배제하고 있었다. 자신만의 하느님이 진리라고 주장하는 태도이다. 그러나 도교에서도 말하는바 도를 도라고 하는 순간 그건 더 이상 도가 아니게 된다. 성공회는 진리를 진리라고 말하지 않는 버릇이 있다. 그것은 시간이 개입되면서 언제든지 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곧 성공회는 하느님을 긴 호흡으로 묵상한다.

 

이런 맥락에서 엘리자베스와 제임스 1세의 비아메디아는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 정치적 타협이라고는 하지만, 내 생각으로는 사람들이 살아있어야 논쟁이건 뭐건 할 것이지 않을까. 죽은 사람은 신학적 논쟁에 참여할 수가 없다. 대립이 극으로 치달으면 그때는 서로를 죽이거나 없애버리지 않고서는 안 된다. 그 이유는 상대방이 자신을 불안하고 불편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곧 모호함이 갖는 불편함과 불안함을 견딜 용기가 없는 것이 극단주의일 수도 있다. 곧 비아메디아는 모호함을 견디는, 이 모호함이 주는 불편함과 불안함을 견디는 용기이다. 서로 삶을 살아가며 반드시 하나 되게 하실 하느님을 신뢰하며 자신의 영역에서 최선을 다해 연구하고 성실하게 살아가야 발전이라는 것을, 성장이라는 것을 생각해볼 수 있다.

 

이런 비아메디아의 경험이 있는 상태에서 성공회는 17세기를 맞이한다. 이때는 근대화의 바람에 성공회는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정치적으로는 왕당파와 의회파가 대립하게 된다. 곧 권위가 이제 왕에게서 의회에게로 넘어가는 때이다. 신학도 왕당파를 중심으로 하는 카톨릭주의를 쇠락하고 의회파를 중심으로 하는 개혁주의가 활개를 치게 된다. 끊임없는 논쟁과 정쟁이 성공회의 모습인 것처럼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정쟁과 논쟁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가. 그 논쟁이야 말로 참된 진리를 탈곡해내려는 농부의 성실한 키질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3. 지금의 성공회가 있기까지

현대 성공회를 언급하기 위해 F.D 모리스, 마이클 램지, 로완 윌리암스로 이어지는 성공회 신앙의 방법을 살펴본다. 이들은 신학을 관념적으로 하지 않았다. 신을 관념 속 추상으로 고정불변한 존재로 굳히지 않았다. 곧 이들의 신앙은 하느님을 인간의 관념과 말 속에서 해방시키려는 몸부림이었다. 그래서 양쪽으로부터 비난 받기 일쑤였다. 그러나 하느님을 신학의 관념에서 해방시키는 일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고, 그저 하느님을 신뢰함으로 따라 살아가는 데에서 시작된다. 그렇기 때문에 진리는 결코 주장이나 논쟁에 갇히지 않는다. 이때 신뢰하는 삶이란 결론 없이 이 모호하고 어려운 길을 가는데, 이것이 맨땅에 헤딩을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신뢰할만한 분이 우리를 이끄신다는 고백이다. 곧 성공회 신앙은 하느님을 앎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따르는 것이다.

 

나오며 내 고백으로부터

이제부터는 내 이야기를 해야 한다. 나는 신학이 이야기이길 바란다. 상대방을 패배시키기 위한 논리나 주장이 되고 싶지 않다.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과 은혜 안에서 서로 하나임을 나누고 감사하기를 바란다. 그것이 나에게 있어서는 이야기이다. 나 또한 인간본성의 이중성의 극을 달리던 인간이었다. 진보적이지 않으면 매도당하는 분위기에서 20대를 보냈다. 반면 교회는 철저한 보수신앙을 지녔다. 그것이 충돌하면서 괴로웠다. 이런 부류의 사람은 누군가를 정죄하고 흑과 백의 논리로 나누는 것을 좋아한다. 흑과 백, 참과 거짓, 보수와 진보, 내편과 네 편 등등의 이분법적 사고가 지배적이다. 나의 3년은 이 이분법을 극복하려고 몸부림친 시간이었다. 그래서 나는 세상을, 하느님을, 나 자신을 이분법적 사고로 보지 않고 하나의 과정으로, 넓은 스펙트럼으로 이해하려고 했다. 그런 눈으로 성공회 신학을 보았을 때 성공회는 과정적이고 스펙트럼으로 이해되었다. 참과 거짓 사이에 수많은 이야기들이 있다. 흑과 백 사이에 무한의 색이 펼쳐있다. 보수와 진보사이에는 어떻게 해서든 행복하게 살려는 수많은 사람들의 삶이 있다. 내편과 네 편 사이에는 한 사람도 잃고 싶지 않는 하느님의 마음이 있다. 이 하느님을 묻고 따르는 것이 성공회 신앙이다.

이렇게 하느님을 사랑하고 따르는 일에는 보수도 진보도 없다. 개신교도 천주교도 없다. 오직 정직하고 진지한 신앙만이 있을 뿐이다. 

  • 아모스2019/10/27 08:32:13 삭제X
    못나고 볼품없는 생각을 잘 읽어주시고 내용보다 더 멋지게 해석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김현미2019/10/26 18:39:37 삭제X
    하나님을 사랑하고 따르는 일에는 개신교도 천주교도 없고 오직 정직하고 진지한 신앙만이 있을뿐이라는 말이 엄청 크게 다가오네요~ 제 안위만을 위해 살고 있지는 않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웃을 돌아보며 동료를 돌아보며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그 사랑을 나눌줄 아는 이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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